긴장 때문인지 잠자리가 바뀌어서인지 항상 시간에 쫓기던 평소보다 약간 여유 있게 잠에서 깨어났다. ‘조금 피곤한 걸 빼면 나쁘진 않네, 시차 적응하는 거 그렇게 힘들지 않군’이라고 생각하며 씻고 짐을 챙겨 호텔 1층으로 내려왔다.(다음 날 후폭풍이 몰려올 줄 생각도 못했음) 아침 식사가 제공되지 않는 호텔이라서 1층 베이커리에서 베이글과 커피를 샀다. 맛없는 베이글을 꾸역꾸역 커피에 말아 넘기고 바로 길 건너 컨퍼런스가 열리는 컨벤션 센터로 향하니 센터 건물 1층에 떡 하니 보이는 스타벅스. 외국에선 만나는 스타벅스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내일 아침부터는 꼭 여기서 먹어야지.
우리의 일정은 더할 나위 없이 간단했다. 법인 담당자나 고객과의 미팅도 없었고 부스를 설치해서 회사 홍보를 할 일도 없었다. 컨퍼런스의 교육 세션만 잘 듣고 오는 게 일정의 전부였다. 그렇지만 반나절 정도 일찍 도착했으면 그 전날 오후의 기조 연설이나 환영 리셉션 정도는 참가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사진은 기조 연설 모습으로 이후에 일정을 같이 보내게 된 삼성의 차장님께서 제공)

세션은 발표(45분), 토론(20분), 짧은 발표(20분)의 세 종류로 구성되어 있으며 1층에 위치한 총 여섯 개 강의실을 인원 수에 맞게 각각 두 세 개로 분리해서 동시에 진행했다. 이런 교육 방식은 KTCA에서 이미 접해본 적이 있어 낯설지 않았기 때문에 각 시간대에 어떤 세션을 들을 지 안내 책자를 보며 시간표를 꼼꼼하게 짰다.
아홉에서 열 개의 세션이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같은 시간대에 듣고 싶은 세션이 두 개 이상일 때에는 어쩔 수 없이 하나를 택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다행히도 두 개가 넘는 경우는 없었는데, 오히려 듣고 싶은 게 하나도 없는 시간대도 있었다. 세션 주제는 콘텐츠 개발/전략, 사용자 경험, 프로젝트 관리 등의 평이하고 일반적인 주제였으나, 참가하는 사람들의 배경이 다양하고 재미있었다. Google, Oracle, Huawei 등의 세계적인 대기업뿐만 아니라 북미 각 지역의 대학교에서 온 사람들과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첫 세션은 Integrating Accessibility from the Startb 라는 제목의 발표로 접근성 (accessibility)에 관한 내용이었다. 2010년 KTCA에서 장애인의 정보 접근성에 관한 주제로 발표를 한 경험이 있어서 익숙한 주제였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택했다. 원래 발표자가 개인 사정으로 참가하지 못해 그의 동료가 대타로 발표를 하게 되어 첫 인상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발표자는 정보 기술의 접근성을 촉진해 장애인의 독립을 지원하는 비영리 단체 Knowbility의 컨설턴트로서 백발의 할아버지였다. 발표 내용은 접근성은 콘텐츠 개발 전반에 걸쳐 통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며, 프로젝트 구상, 디자인, 개발 조건, 조달 과정, 유지 보수 등 전 과정에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사항이었다. 하지만 유니버셜 디자인(Universal design) 같은 개념이나 장애인들도 비장애인과 동일한 활동에 참가해서 동일한 정보를 획득해야 한다는 접근성의 기본 원칙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내용을 꼽아 보자면 미국의 Section 508보다 WCAG가 더 실용적이라는 점, 접근성의 4원칙 POUR (Perceivable, Operable, Understandable, Robust) 등이 있다. 발표자가 회사에서 직접 경험한 사례를 들려줬는데, 접근성 관련 서적을 다 마무리해서 출판한 후에 디지털 파일로 만들기 위해 복합기의 OCR 기능을 이용해 스캔을 했는데 결과물에서는 스캔한 문서의 글자가 모두 제대로 인식이 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알고 보니 당시 회사에서 사용하던 복합기 OCR 옵션의 기본값이 OFF 였다는 것이다. 이렇듯 실제 경험으로만 알 수 있는 정보가 얼마나 소중한 지 새삼 알게 되었다.

다음 세션은 Targeting Documentation to Your Users’ Goals. 너무나 당연하고 일반적인 제목이었지만(과연 독자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게 작성된 문서란 게 있나?) 같은 시간대에 다른 세션들은 내 업무나 관심사와 동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별 거 없을 듯했던 이 세션에 참가자가 제일 많고 내용도 알찬 반전이 있을 줄이야.
발표는 NetIQ라는 시스템 관리/보안 솔루션 IT 기업에서 정보 개발과 프로그램 관리를 맡고 있는 이사(director)가 담당했다. 콘텐츠의 목적을 독자에게 맞추면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고 한다: 긍정적인 사용자 경험 제공, 제품에 대한 충분한 정보 제공, 사용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고품질의 문서 제공, 제품 GUI 향상. 그리고 기대되는 이득으로는 콘텐츠 명확, 재사용 용이, 유지/번역 비용 감소 등이 있다. 기존의 접근법과 목적 부합 접근법을 비교하면 큰 차이가 드러난다.(아래 표 참고)

그리고 콘텐츠 구성 요소에 따라 효과적인 접근 방법을 취사 선택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통합적 접근법은 설치, 구성, 문제 해결과 같은 콘텐츠에 효과적이며, 목적별 접근법은 사용법, 참조 작성에 효과적이라고 한다.

발표가 끝나고 강의실 밖으로 나오니 다른 세션을 듣고 나오신 과장님이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자분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계셨다. 일 년 즈음 사내에서 진행했던 STE 스터디 멤버로 참여하신 삼성 모 사업부의 차장님이라고 하신다.(STE에 관한 정보는 13년 STC 컨퍼런스 후기 참고) 두 분은 같은 스터디에서 만난 구면인데 정말 우연히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차장님은 용감하게도 우리보다 하루 먼저 혼자 도착하셔서 이미 근처 탐색까지 마치셨다고 한다. 생각지 않은 동행이 생겨서 기쁜 마음으로 남은 일정은 셋이서 움직이기로 했다.

교육 세션과 별도로 컨벤션 센터의 3층에는 전시 부스가 마련되어 있었다. 오후 세션까지는 두 시간 정도가 남아서 부스를 천천히 둘러보기로 하고 3층으로 올라갔다.
전시관 입구에서 피닉스 안내 책자를 나눠주고 있는 STC 관계자에게 이 곳은 너무 뜨겁고 건조하다고 이야기하니 지구상에 모래 폭풍이 부는 곳이 피닉스와 중동 어느 나라(기억 안 남) 두 군데이며 8월의 피닉스는 건조하지도 않다고 웃으시며 Welcome to Phoenix! 라고 환영해 주셨다.(습도가 낮으면 같은 온도라도 더위가 훨씬 덜하다. 현지 기온이 대낮에 40~42도 정도였는데 뜨겁기만 하지 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나라 초여름이 견디기 더욱 힘들다.)
약 50여개 정도의 부스에서 TC 관련 제품과 서비스를 소개하며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Adobe, SDL, Google과 같이 익숙한 기업부터 다양한 중소기업이 참여했으며 애리조나 주립대, 위스콘신-스타우트 대학교 같은 교육 기관에서도 부스를 운영했다. 눈길을 끄는 곳은 American Medical Writers Association의 부스였다. 테크니컬 라이터도 아직 생소하게 여겨지는 나라에서 온 나에게는 메디컬 라이터라는 직종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메디컬 라이터 협회가 70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부러웠다. 간단한 스낵과 음료로 점심을 때운 우리는 오후 세션을 듣기 위해 1층으로 다시 내려갔다.

오후 첫 세션은 Touch, Voice, and Gestures: How to Craft Your User Assistance. 터치, 음성, 손 동작과 같은 인터랙션으로 조작하는 기기나 서비스가 많아지는 요즈음, 적합한 단어 선택의 가이드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발표자는 WritersUA라는 1인 출판사를 운영하는 작가로서, 자신이 최근 펴낸 책을 바탕으로 모바일 환경에서 사용자 지원(user assistance)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한 터치가 조작법의 전부인 현재의 모바일 기기에서 대안으로 어떠한 동사를 사용할 지, 음성 조작과 떠오르는 다른 조작법들, 터치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방법 등을 실제 소프트웨어를 예로 들어서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발표자는 Windows 8의 UI를 예로 들며, 마우스가 처음 등장했을 당시 UI를 설명하는 데 얼마나 큰 어려움이 있었는지 상기하며 지금은 누구도 그러한 혼란을 겪지 않는다는 점을 집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분야에서 이렇게 오래 일하고 연구하는 사람만이 시간의 흐름에 따른 기술의 변화를 따라가고 이해할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슬슬 감기는 눈꺼풀을 지탱하고 향한 다음 세션은 A Content Strategist’s Guide to Mobile Platforms. 역시 대세는 모바일인지 모바일 관련 세션이 동시에 여러 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택한 세션은 Apple, Google Play, Amazon Kindle 등에 설치되는 앱의 생태계에 관한 내용이었다.
즉, 동일한 앱이라도 관련 콘텐츠를 각 생태계의 시스템에 맞추어 전략적으로 가공하고 제공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발표자는 언어 학습 소프트웨어로 유명한 Rosetta Stone의 직원이었는데, 자사의 한 앱을 예로 들어 각 앱 마켓에 앱 등록 시 앱 이름, 설명, 키워드 등을 어떻게 작성하는 지 실제 사례를 통해 살펴보았다.

마지막 세션은 특이하게 전시회 부스가 있는 3층에서 진행하는 세션을 듣기로 했다. HTML5 and the Modern Web이라는 제목의 발표로, eGloo Technologies라는 회사의 대표가 자사의 홍보 부스 뒤에 자리를 마련하고 진행했다.
HTML5가 다른 기술 대비 어떤 특징이 있는지, HTML5로 콘텐츠를 제작하면 어떻게 활용이 가능한지 등의 HTML5의 장점을 주로 설명하며 자사는 이미 4년 전부터 HTML5를 도입해서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는 자기 자랑으로 끝나는 조금 후회되는 세션이었다.

오늘의 교육 세션이 모두 끝나고 로비에 모인 우리 셋이 부실한 점심과 연이은 듣기 평가(…)로 바닥난 체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은 밥이라고 결론 내리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미국에 장기 체류 경험이 있으신 과장님은 그나마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은 중국 음식이라고 근처에 가까운 중국식 뷔페로 안내하셨다. 안남미는 몇 번 먹어본 적이 있었고 원래 우리가 먹던 쌀보다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는데 껍질콩 볶음이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 줄 몰랐다. 정신 없이 몇 접시를 비우고 원래 처음부터 함께 여행을 떠난 일행마냥 수다 삼매경에 빠져서 한참을 식당에 앉아 있었다. 저녁 일정은 가까운 쇼핑몰에 들러서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으로 하고 다시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호텔 1층 천장에 달린 얇은 줄 같은 파이프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건조한 지역에서는 이런 식으로 외부 공간에서 냉방을 한다고 한다. 머시기 샤워라고 했는데 벌써 기억이 안 난다. 비루한 기억력…
편안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선 쇼핑몰은 어제 가본 Walmart는 패스하고 라이벌인 Target. 정말 미국은 공산품의 천국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물건이 이 정도로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니… 이 나라에서는 소비가 미덕이 아니라 절약이 악덕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맥주 몇 병과 간단한 안주를 돌아오는 길에 경전철이 지나가고 있었다.
도입된 지 5년 남짓되었다는 경전철은 철로가 지상에 놓인 지상철이서 자동차와 함께 달린다. 한 가정당 최소 두 대씩 자가용을 보유한 나라에서 이런 대중 교통 시설이 적자를 안 보고 잘 돌아갈 수 있을까 잠깐 의문이 들었지만 뭐 남의 나라 얘기니까.
그래도 이렇게 더운 도시에서 전철 기다리느라 땡볕에 앉아 있으려면 짜증나겠다는 남 걱정을 잠깐 해줬다. 숙소에 들어와서 맥주로 하루의 피곤을 달래며 내일의 일정을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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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7 11:56 2014/06/17 11:56